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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도살 사기꾼’과의 일주일… 놈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언론매체 조선일보
작성일

2024-09-01

조회수 70

‘돼지 도살 사기꾼’과의 일주일… 놈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아무튼, 주말]
스팸 문자 일부러 낚여보니
여기에 속는다고? 하지만…

“[국제발신] 오랜만이에요. 9월에 한국 가는데 시간 괜찮아?”

“[국제발신] 31일 서울 도착해요. 공항 마중 나와주세요.”

“[국제발신] 이혼한 지 5년 돼가니 많이 외로워요.”

며칠 새 이런 문자메시지를 10통 넘게 받았다. 00777…로 시작되는 낯설고 긴 전화번호,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외국인 여성 행세를 하는 어설픈 한국어, 혼자 한국에 가는데 시간이 빈다는 유혹, 자신의 메신저앱 ID를 추가해달라는 부탁까지. 무차별 무작위 살포되는 미끼, 얼마 전 개그맨 박명수도 받아봤다고 한다. 진동하는 사기꾼의 입냄새.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개수작일까?

잡아먹으려 오래 살찌운다

그리하여 저 수상한 메시지 중 하나를 골라 ‘친구 추가’하고 먼저 말을 걸어봤다. “저를 아세요?” 칼답이 왔다. “김직호 아닌가요?” 누가 봐도 방금 지어낸 엉터리 이름. “아닌데요.” “죄송합니다. 제 어시스턴트가 잘못된 전화번호를 보내서 실수로 귀하를 추가했을 수 있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온라인 번역기를 돌린 티가 역력했다. “그래도 어쩌면 일종의 운명일지 모르니, 우리가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른 ID에도 연락을 취해본 바, 이 같은 서론은 공통적 매뉴얼인 듯했다. 이제 속아줄 차례. “몇 살이냐”고 물었다. “하하, 제 이름은 장스이(Zhang Shiyi)이고 32세입니다. 홍콩 출신이고 현재 인천에 있어요.” 여성 의류 사업을 하고 있다며 바삐 손가락을 놀리던 그는 “오빠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했다. “편한 대로 불러.” “결혼은 했나요?” “비밀이야.” “당신에게 아내가 있다면 우리의 대화가 영향을 받을까요?” “나한테 뭘 원해?” “하하, 지금은 그냥 친구일 뿐입니다.”

매일 아침 먼저 인사가 도착했다. 끼니 때마다 내 안부를 챙겼다. 미용실에, 백화점에, 식당에 왔다며 사진과 영상을 보내왔다. 프로필 사진과 동일한 아리따운 동양인 여성. 사진을 다운받아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 해봤더니, 대만 광고 모델이었다. 도용한 것이다. “오빠의 사진도 보여주세요.” 일본 AV(성인물) 남자 배우 사진을 보내줬다. “신사 같고 성숙하다”는 칭찬 세례. 어서 마각(馬脚)을 드러내길 바랐으나 7일 동안 그는 계속 환심을 사려 애쓸 따름이었다. 인내심에 한계가 왔다. 먼저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 저녁에 만나자. 내가 인천으로 갈게.”

일론 머스크가 채팅을 걸어온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식의 접근 방식을 ‘돼지 도살 사기’라고 한다. 돼지를 키우듯 천천히 먹이(애정)를 먹여 신뢰 관계를 살찌운 뒤 단칼에 도살하는 금전 사기. 미인계와 거짓말로 현혹하는 ‘로맨스 스캠(Romance Scam)’이다. 관련 피해가 심각해지자 지난 2월부터 경찰청이 별도로 통계 작성을 시작했다. 6개월 새 791건, 피해 액수는 502억원에 달한다. 이 같은 범행의 특징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속여 먹기 위해 한 달, 징한 경우 1년까지 교제를 이어간다.

다시 채팅창으로. “인천으로 가겠다”는 도발이 먹혔는지, 놈이 응수했다. “정말 나를 좋아해? 그냥 즐기고 싶은 거라면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 몇 마디 징그러운 대화가 오가고, 드디어 그가 본색을 드러냈다. “요새 내 쇼핑몰 벌이가 좋지 않아요…. 오늘은 214달러밖에 못 벌었어요. 투자만 해주면 당신은 내 이익의 10%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연인에게만 이 일을 허락할 거예요. 감정은 장난이 아니잖아요.” 이윽고 ‘알리 익스프레스’ 로고가 들어간 조악한 웹사이트 주소를 안내한 뒤 이런저런 가입 등을 요구했다. 굿바이.

당신이 아무리 선량하고 외로워도, 생면부지 타인이 질척댄다면 모질게 쳐내는 게 신상에 이롭다. 그게 설령 미국 갑부 일론 머스크일지라도. 지난해 7월 한국 여성 A씨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누군가의 ‘팔로잉’ 알림이 떴다. 이름도 사진도 일론 머스크였다. “나는 무작위로 팬들에게 먼저 연락한다”며 자신의 여권과 테슬라 CEO 신분증 인증샷을 전송했다. 물론 사칭 계정이었지만 A씨는 “의심하면서도 진짜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딥페이크 기술로 감쪽같은(?) 영상 통화까지 나눴다. 교류가 무르익자 천하의 일론 머스크가 A씨에게 코인 투자를 권유했다. 7000만원을 넣었다. 해당 코인 거래처는 가짜였다.

101세도 당했다… ‘대대적 광고’ 필요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악용한다는 점에서 가장 비(非)인간적인 죄악이다. 현재 국내 ‘로맨스 스캠 피해자 모임’ 온라인 카페에는 약 4300명이 가입돼 있다. 황당한 사연이 매일 업데이트된다. 이 카페에 가입한 피해자들에게 “사기 피해를 해결해주겠다”며 접근한 2차 범죄도 있다. 법무법인 대륜 이승호 변호사는 “관련 상담 및 사건 의뢰 건수가 늘고 있다”면서 “소셜미디어로 사람을 사귀고 마음을 주는 것에 거부감이 적은 분들이 쉽게 표적이 된다”고 말했다. “사진과 외모가 다르기에 실제 만남은 결코 이뤄지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로 호감을 사면서도 만남은 피하고 그러다 금전 거래를 요구하는 전형적인 수법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칭 행세는 제각각. 주한 미군, 해외 파견 의사 등 ‘그럴듯한’ 직군을 연기한다. 지난 6월에는 ‘이스라엘 전장에 파견된 주한 미군 의사’라는 독특한 캐릭터도 등장했다. 강원도 양양에 사는 여성 B씨와 소셜미디어로 한 달 정도 채팅을 이어오다가 “가자지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5000달러(약 660만원)가 없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 못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반(半)협박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B씨의 친구가 B씨를 택시에 태워 경찰서로 데려갔지만 B씨는 “빨리 송금해야 한다”며 신고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주변의 설득 끝에 다행히도 피해는 면했다.

피해자의 순진함을 비난할 수도 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물론 기본적인 합리성에만 기초하면 이런 사기 피해는 피할 수 있지만 사회적 고립이라는 틈을 파고드는 ‘맞춤형 접근’에 무장 해제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며 “민감한 요구를 받았을 때 피해자가 단 한 번이라도 관계기관에 ‘이게 맞나’ 물어라도 볼 수 있게 정부가 적극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헷갈리면 잠깐 멈추고 경찰서에 전화 한 통 걸어보라는 것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이 같은 유형을 ‘10대 악성 사기’로 재편하고 근절 방안 마련에 나섰다. 정부는 불법 스팸 발송 업체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피싱 범죄 특별 단속을 10월까지 벌인다.

‘외로움’을 이용하는 도살꾼들의 암약은 세계적인 추세다. 영국의 경우 최고령 피해자가 101세로 조사됐다. 올해 초 영국 정부는 TV·라디오·옥외광고 등으로 이 같은 ‘낚시’의 유형을 알리는 대규모 광고 캠페인 ‘STOP! THINK FRAUD’를 시작했다. 잠깐 멈춰 의심해보자는 구호. “사기로부터 면역인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나 정보를 훔치기 전 범죄자들은 피해자를 감정적으로 조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잠시 멈추고, 생각하고, 그들이 다가올 때마다 확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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